영화 <미성년> 리뷰

2019.05.12 

김윤석의 입봉작, <미성년>은 독특한 작품이다. 중년 남성의 한국 탑 배우가 감독했다고 믿기 어려운 감성을 가지고 불륜이라는 소재를 블랙 코메디이자 성장담으로 풀어낸다. 


러닝타임 96분
같은 학교에 다니는 윤아와 주리는 자신의 엄마와 아빠가 서로를 상대로 불륜을 저지르고 있음을 발견한다. 윤아의 엄마인 미희의 배는 불러오고, 주리의 아빠인 대원은 비겁하게 도망가기 바쁘다.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세계에서 새로운 우정을 그려나가는 윤아와 주리. 

김윤석은 매우 흥미로운 배우다. 과거 자신이 출연한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를 홍보하는 과정에서 상대 여배우를 두고 '(영화 성공 공약으로) 여배우 무릎담요를 내려주겠다'라고 발언한 바 있다. 젠더감수성이 요구되기 시작한 2016년에 맞지 않은 발언이었다. 이를 두고 많은 이들이 항의했으며, 김윤석은 공식적으로 발언에 대해 사과하고, 페미니즘 책을 읽는 것을 '인증'한 바 있다. 


'여혐'논란에 휩싸인 남성 연예인 중 보기 드문 사과였으며 이후에 책을 읽는 반성은 유례없는 것이었다. 특히나 이미 정상급에 오른 '연기파' 중년 남성 배우로서 이렇게 성실한 행보를 보인 것은 그가 유일하다. 

윽박지르고 투박한 이른바 '경상도' 남자를 주로 연기해온 그가 '불륜'을 소재로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어찌보면 뻔한 감성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커보였다. CJ가 주로 생산하는 '눈물나는 가족이야기'이거나 포르노와 다름없는 치정 멜로, 또는 홍상수식의 남성의 자기연민 쇼가 쉽게 떠올랐으나 그는 그와 정반대에 있는 17세 여고생의 눈으로 해당 사건을 조망한다. 담담하고, 성숙하게 

주리와 윤아, 윤아와 주리 

문과와 이과. 양아치와 날라리. 알바를 뛰는 윤아와 중산층 자녀인 주리가 대조되는 방식은 그들의 옷차림과 배경에서 묻어나오지만 같은 상황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모습은 닮아있다. 


주리 (오른쪽) 는 아빠인 대원이 불륜을 저지르는 걸 보고 충격 받기 보다는 이를 엄마 몰래 해결하려 애쓴다. 불륜 상대인 미희의 딸을 만나 '끝내'라고 으름장을 놓고 엄마가 알기 전에 아빠와 관련한 이야기를 하려 노력한다. 그녀는 연약한 제3자로 남아있지 않고 적극적으로 움직인다. 또래인 윤아의 머리채를 뜯어가며. 

윤아 (왼쪽) 는 보다 대담하다. 철없는 엄마를 향해 '그 아저씨가 사랑이라도 한대?'라고 소리지르고, 주리에게 전화한 주리의 엄마 영주에게 대원과 미희의 불륜을 고발한다. 도박에 빠진 아빠와 투정부리기 바쁜 미희 사이에서 그녀는 알바를 하고 동생을 맞이할 준비를 홀로 해나간다. 상황 때문에 일찍 철이 든 그녀는 대담하고 망설임이 없다. 

언뜻보면 서로를 탓하기 쉬운 이 관계에서, 둘은 새로운 우정을 만들어나간다.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세계에 굴하지 않고 문제 해결 (미희의 임신과 남동생의 이른 출산)을 위해 해결책을 찾아나가기 시작한다. 

영화는 이를 비웃지 않고 아주 진지하게 대하는데, 이는 윤아가 영주에게 병원비로 자신의 알바비 50만원 가량을 전달할 때 드러난다. 어른의 입장에서 적다면 적은 돈을 야간 알바로 벌어낸 윤아는 자신의 책임으로 돌린다. 그녀는 영주가 이 일에 책임이 없음을 알고 자신의 몫을 다하고자 한다. 영주 역시 이를 '애가 무슨 돈이 있다고'로 치부하지 않고 받아드린다. 어린 존재가 성숙하게 행동할 때 이에 맞게 응하는 장면은 보기 드물며, 이 영화가 전적으로 윤아와 주리의 성장담임을 보여준다. 


'불륜녀' 를 재현하는 방식

두 청소년의 성장뿐만 아니라 이 영화는 '불륜녀'를 입체적으로 재현해낸다. 전의 작품  속에서 '불륜녀'는 주로 #젊고 #신비로우며 #악독하고 #돈을 바라거나 성공을 목적으로 #(순진한-멍청하고 책임감없는-)남자를 유혹해내는 존재로 재현되어 왔다. 정상가족을 위협하는 존재로서 '창녀'로 자리잡아온 '불륜녀'의 이미지를 <미성년>은 다르게 재현해낸다. 


남자보는 눈이 없을 게 분명한 미희는 싱글맘으로 윤아를 키운다. 그녀는 병원에서 모르는 사람에게 소리를 지르는 우울증 증상을 보이다가, 주리의 과자를 뺏어먹는 천진함을 보이기도 하며, 대원에게 애교섞인 목소리를 내는 연인의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윤아에게는 자신의 처지를 이해해달라며 투정을 부리기도 하는 바람직하지 않은 양육자인 동시에 자신의 아이가 건강하지 않다는 사실을 부정하고자 인큐베이터를 단 한번도 들여다 보지 않은 고집을 부리기도 한다. 

젖이 샌 옷으로 영주를 맞이 하는 그녀는 떡진 머리에 부은 얼굴이 아니라 몸에 붙는 긴팔에 옅은 화장을 한 차림이다. 결코 사랑할 수 없지만 나와 닮아있는 미희의 모습은 금기시되어온 불륜을 우리의 피부에 닿을만큼 가깝게 전달해낸다. 도망칠 곳 없이, 구질구질하고 피곤하게.

'불륜남'의 말로

'불륜녀'와 달리 '불륜남'은 주로 매력적으로 그려져왔다. 주로 자신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으며 사회의 짐을 지고 있는 그는 위험하지만 상대를 끌어당기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그는 현실의 족쇄로부터 -가족, 회사, 등- 벗어나고자 유혹에 빠지며 이로인해 고뇌한다. 


이런 판타지를 비웃기라도 하듯, 대원은 버려진 콘돔 속 정액마냥 불쾌하고 하찮은 존재로 그려진다. 구부정하게 김윤석 특유의 다 다물어지지 않은 발음을 구사하는 대원은 불륜이 들통나자 영주에게 무릎 꿇고 용서를 빌며, 병원에서 자신을 부르는 주리에게 도망가고, 만나자는 미희를 뿌리친다. 비겁하기 그지 없는 그가 단죄되는 방식은 '왜'라고 묻기도 힘든 10대 남자 청소년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하는 것이다. 바람이나 쐬러 (도망치러) 간 서해에서 그는 친구를 만나지 못하고 한밤중에 고속도로에서 구타를 당한다. 

이렇게 벌레처럼 묘사되는 탓에 대원 역 배우를 섭외하지 못해 감독인 김윤석이 직접 대원을 연기했다. 오랜시간 관찰한 것마냥 그의 묘사는 탁월하다. 부하 직원에게 화 내고 딸의 눈을 피하며 미희에게 자신의 처지를 이해해달라고 짜증을 내는 등의 연기는 얼마나 오랜시간 김윤석이 남자들을 관찰해왔는지를 보여준다. 


덧1 
자칫 징그러워 보일 수 있는 (그러나 가끔 누구나 기괴한 짓을 해보고 싶지 않은가? 나로선 공감이 갔다) 뼛가루를 마시는 장면은 일종의 성인식 같다. 성장담의 마침표

덧2
배우출신 감독답게 캐스팅 역시 눈여겨 볼 만하다. 이정은 배우의 서해방파제 건달 연기는 최고의 한국 호러였다. 

덧3
영화 덕에 각종 여성 나체가 가득했던 '미성년' 검색 결과가 정화되었다.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와 같은 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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